평북노회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평북노회의 태동
1907년 대부흥회운동은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을 이룬 해, 그해 9월 17일 오전 9시 평양 장대제 교회 예배당에서 조직된 독노회는 안건 처리 중 3번째로 경기, 충청, 평북, 평남, 황해, 전라, 경상, 함경도 등 각 지역에 7개 대리회를 설치 노회의 위임 사항을 처리케 했다.
당시 교세는 교회 수 총 737개 처에 세례교인 16,054명 유아세례인 학습 원입등 모두 73,844명, 이었다.
그 후 5년 만에 교세의 전국 확장으로 1912년 9월 1일 총회가 조직되고 이에 앞서 1912년 2월 15일 평북 선천읍 남교회 예배당에서 제 1회 평북노회가 열려 전 대리회장 노세영 선교사가 창립취지를 설명하고 회장에 위대모, 서기 정기정 씨를 선출하는 한편 7개 시찰 구역으로 나눠 오직 복음 전파에 힘써 한국교회의 예루살렘으로 호칭되었다.
노회의 분립
평북노회는 평북 선천을 중심으로 교세가 급증 1917년 제11회 노회에서 산서 노회를 분립하였다, 이어 1918년 제14회 노회에서 의산노회를 분립하고 1929년 제30회 노회에서 용천 노회를 1934년 제46회 노회에서 삼산노회를 1939년 제56회 노회에서 평동노회를 각각 분립함으로써 평북지역에서 7개 노회가 성장 발전하게 되었다.
노회의 발전
평북노회가 제1회부터 중심적으로 실행한 사업은 선교사업이었다, 국내는 물론 만주 지역(안동봉천 길림)과 중국 산동성까지 선교사를 파송하는 한편 노회 산하 부인전도회연합으로 각 군, 읍, 면에서 전도인을 파송하여 외지선교를 강화하고 제10회 노회시에는 내외지역에 선교사 18명을 파송 오직 복음전파에 힘썼다.
이처럼 평북노회는 평북 선천읍을 중심으로 복음이 활발히 선포되어 약 5 천호 이상 되는 선천읍 주민 70%이상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곳 선교사들은 선천의 미동병원을 세우고 의료선교를 활발히 전개하는 한편 선천 신성중학교와 보성여자중학교를 설립 남녀 인재양성에 크게 이바지하고 또 대동고아원을 설립 오갈 때 없는 고아들을 보호 양육하였다.
교단의 중심적인 노회로 맥이어
평북노회는 1910년 12월7일 일제가 허위 날조한 105인 사건과 3.1 독립만세 사건 등으로 수많은 교역자 및 평신도 지도자들이 당국에 체포되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교역자 양전백(1915년평북노회장, 1916년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장), 유여대, 김병조, 이승훈, 이명룡 등을 비롯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어 제16회 노회시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 중에서도 전도의 열심은 가일층 고조되어 3.1 독립 운동 후 1920년 3월 17일 제17회 노회에서 만주와 경남 각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더욱 전도에 힘썼다.
당시 평북출신 산동 선교의 현황을 보면 1915년 내양현에 선교사로 파송된 방효현 목사를 비롯 홍승한 목사(1917), 이대현 목사(1923), 김순효 여선교사(1931)가 각각 파송되었고 1937년엔 장남 방지일 목사가 대를 이어 약관 26세로 산동성에 파송되었으며 선교에 착수한지 불과 20년 만에 총회는 선교사 4명과 교회 51개 처에 교인 1천3백24명, 학교 7개로 교세가 확장되어 마침내 내양노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시련의 극복
한편 일본 제국은 1940년 제 31회 총회 이후 국내 각 교단을 일본의 어용기관으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일 조직화 하였다. 이 때 평북노회는 그들의 교구회로 변질하지 않고 일제의 탄압에 생명을 걸고 대항 평북노회를 그대로 유지, 해방을 맞았으며 일제의 교구회라는 어용기관에 가입 없이 노회명을 계승함으로서 총회산하 장자노회가 되었다.
해방 후 북한에는 교회 내분을 꾀하고 교회 자멸을 획책한 소위 기독교연맹이라는 집단이 출현하였다.
이북 5도 연합회(연합노회장 김진수목사)는 신앙 수호를 위해 이들과 맞서 싸움을 계속하였다.
1946년 10월 20일 이북연합노회는 동년 11월 3일 주일에 실시하는 총선거를 반대하는 다음과 같은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 선포하였다.
① 성수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여하한 행사에도 참가하
지 않 는다.
② 정치와 종교는 엄격히 구분한다.
③ 교회당의 신성을 확보하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의무요 권한이다, 예배당은 예배
이외에는 여하한 경우도 이를 사용함을 거절한다.
④ 현직교역자로서 정계에 종사할 경우에는 교직을 사면해야 한다.
⑤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
이상 조항을 가결할 때 전원 기립하여 엄중히 가결 했다.
그러나 북한 공산당은 주일인 1946년 11월 3일에 선거를 강행함으로 평북노회 산하 많은 교역자와 평신도들이 순교를 각오하고 이 선거에 불참, 성수주일을 고수하는 한편, 국가적으로 오는 모든 시험에 도전했다.
따라서 이러한 선거불참 등은 마침내 극심한 교회박해를 몰고 왔다. 6.25 동란을 전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 당했다.
이렇듯 일제 말기엔 신사 참배 문제로, 해방 후엔 공산당의 무자비한 정책만행으로 수많은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순교를 당했다.
지역 없는 노회로 출발
6.25 사변으로 남하한 피난 성도들로 조직된 평북교회가 부산 용두산 중턱에 설립되고 1952년 3월 19일 평북노회가 회순을 거처 계승 제 73회로 회집되어 지역 없는 노회로 출발하였다.
이렇듯 슬픈 역사 속에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한 평북노회는 전국을 무대로 무교회 지역에 교회를 개척 설립하는 등 전도 사역에 적극 힘써왔다.
1972년 1월 13일에 평북, 평동, 합동 노회가 총회합동위원장 강신명 목사의 인도로 서울 동안교회 예배당에서 모여 노회 명칭을 모노회인 평북노회로 가결, 역사적인 합동을 이룩하고 발전을 계속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노회산하 교회는 강남시찰, 남시찰, 동시찰, 동부시찰, 서시찰, 서부시찰, 영남시찰, 중부시찰 등 8개 시찰에 266개교회 목사 538명 장로 293명 세례교인 44,029명을 비롯하여 총 115,560명의 성도가 이 땅의 복음화와 북한 주민들의 마음에 주의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기를 밤낮으로 부르짖고 있다.
또한 대만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 및 동북아시아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교민 선교와 원주민 선교에 주력하고 있다.
최근 21세기 들어서 이북과의 원활한 영적 물적 교류를 통하여 통일 이후의 선교에 전념하여 언젠가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옛 고향 노회 지역으로 되돌려 보내 주시리라 믿고, 이북 땅에 다시금 복음의 횃불이 타 오르기를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