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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좋은 군사 평북노회 대전동안교회 박석신 장로
2025-03-23 06:46:30
강영철
조회수   52

5개의 암, 300번의 항암수술에도 봉사와 간증의 삶 [ 아름다운세상 ] 죽음의 공포, 투병의 아픔 극복하며 희망 주는 박석신 장로(평북.대전동안교회 시무장로)

한국기독공보 2025년 03월 21일(금) 13:57

5개의 암 진단을 받고 300회 이상의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삶의 의지를 잃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을 위해 호스피스 사역과 간증을 이어가는 신앙인이 있다. 박석신 장로(대전동안교회)는 지난 2011년 직장암 말기 선고를 받은 후 지금까지 5가지 암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명랑하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잃지 않아 그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전하고 있다. 지난 2월 28일 약속 장소인 대전동안교회 당회장실에는 피골이 상접하고 피부가 검은 일반적인 암환자의 모습이 아닌 환한 얼굴을 한 100kg이 넘는 거구의 중년이 앉아있었다. 과거 이야기를 하던 중 박 장로는 20대의 자신을 '건달'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무술 유단자에 140kg에 육박하는 거구의 몸으로 '어둠의 세계'에 몸담았던 그는 조직간 싸움에 휘말려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던 중 알고 지내던 어르신 목사의 반 강압적인 권유에 대전신대에 입학해 신학을 공부하게 됐다. "깜빵(교도소) 갈래, 신학교 갈래"라는 목사의 말에 '울며 겨자 먹기'의 마음으로 신학교에 들어갔던 터라 좌충우돌이 적지 않았지만 그는 서서히 신학교 분위기에 물들어갔다. "성경 한번 들춰보지 않은 채 신학교에 가니 참 힘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신학생들조차 진짜 거룩했어요. 제가 욕하고 험하게 대해도 저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사랑으로 대하더라구요." 신학교를 마치고 전도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목회자의 길은 만만치 않았다. 담임목회자와의 갈등을 겪으며 그는 다시 깊은 회의에 빠지며 목회자의 길을 포기하고 심지어는 교회에도 출석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신학공부를 하며 '건달 박석신'의 내면은 많이 변해 있었다. 다시 건달로 돌아가는 일만큼은 하지 않기로 결심한 그는 아내의 권유로 다시 교회에 출석을 시작했다. 그는 막노동부터 바닥 껌 떼기, 우유배달, 신문배달, 주유소 아르바이트 등 하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로 돈 되는 일이면 다한다는 정신으로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주유소 소장으로 일하던 중 그를 눈여겨 보던 단골손님이 그에게 식자재 관련 사업을 해볼 것을 권해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금새 번창했고, 대기업에서 기업합병을 제안해 와 대기업 부장으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2011년도 풍파 많던 그의 삶에 이제 안정과 행복, 안락한 생활이 시작될 참이었다. 그런데 인생은 예기치 못하게 흘러가는 법. 바이크 라이딩이 취미인 그가 허리통증을 호소하자 동호회 회원인 의사의 권유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특이 케이스의 암이 발견된 것. 암이 얼마나 진행이 되었을까 확인하기 위한 수술을 했는데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의사는 가족들을 불러 수술해도 가망이 없다며 수술 없이 덮겠다고 했지만 그의 아내와 아버지는 "죽어도 좋으니 일단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없애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럼에도 그는 4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가족들 모두 마음의 각오를 하고 그는 퇴원 수속을 밟았다. 4개월이 지났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신학교 다닐 때 겨우 한번 읽어보았던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말로는 지금까지 100독은 했을 거라고 한다. 2013년 2월 5일 배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직장암은 대장으로 전이됐다. 대장을 절제하고 항문까지 없앴다. "저는 항문이 없어요. 대변 주머니(장루)는 혼자 못 갈아요. 저희 집사람이 해줘야 했는데 대변 냄새와 살이 썩는 냄새가 섞여 고약한 냄새가 납니다. 제가 너무 아파 인상을 썼더니 아내가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도 힘들어지니 인상을 쓰지 말라더군요. 임산부가 아이 낳을 때 난산의 고통이 8이라며 저는 9 정도의 통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제 인상을 쓰지 않아요. 그냥 웃지요." 이런 상황에서 병은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됐다. 암은 위로도 전이되어 위를 절제했고, 골반으로도 전이되어 엉덩이 뼈도 잘라냈다. 너무 아파 실리콘을 너무 세게 깨물어 이도 망가져 치아도 모두 상할 정도였다. 걷는 게 신기할 정도의 상황이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성경을 읽고 하루에 1만 8000보 정도를 걸으며 재활에 몰두했다. 이 모습에 주치의도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제 주치의 선생님은 제가 처음 만났을 때는 신앙이 없으셨는데 저를 보고 교회 다니기 시작했다고 하시더라구요. 저를 암으로는 죽지 않게 하시겠다며 최선을 다해 치료해주세요." 그는 지금도 두 달에 한번씩 신장에 달아놓은 인공주머니를 교체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병원을 오간다. 이렇게 심각한 건강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는 병원에 가지 않는 날에는 택배회사에서 야간 상하차 작업을 하고, 이삿짐 센터에서 짐도 나른다. 이런 척박하고 힘든 삶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신앙적으로 이겨내려는 모습에 그가 소속되어 있는 대전동안교회 교인들은 그를 장로로 선출해 결국 2020년 12월 20일 장로 임직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 2022년에는 담임 김경호 목사와 당시 대전신대 총장이었던 김영권 목사의 권유로 정식 대학교 인가가 나기 전 공부한 것은 소용이 없으니 다시 신학공부를 하라는 권유를 받아 학업도 시작했다. 벌써 올해 4학년이다. 그는 최근에는 병원에서 호스피스 활동도 시작했다. 그보다 오래 병원을 다닌 사람 없고, 더 오래 고통을 당한 사람도 거의 없기 때문에 그가 위로하고 기도하면 사람들은 위안을 얻곤 한다. 호스피스 봉사를 하면서 그의 삶이 연장되는 이유에 대해서 함께 사역하는 권사들이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한다. "장로님 안 데려가시는 것은 아픈 분들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거예요."  

 

 

댓글

강영철 2025-03-23 06:58:36
출처 한국기독공보(2025.3.21) 금주 보도를 참고하십시오 https://pckworld.com/article.php?aid=10602042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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